Yaong

Written by a cat

2000년대 초반, 나는 들고 다닐 수 있는 나만의 백과사전을 만들어 지식을 정리하고 싶어했다. 전자수첩에 처음 시도하였으나 인터페이스나 기능 면에서 한계를 느꼈다. 다른 대안을 찾다가 PDA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 10여년 간 사용하였다. 실제 사용했던 기기들에 대하여 회고해보았다.

1. 셀빅i

Cellvic i

나의 첫 PDA. 팜이 지배하던 시대에 선전하던 국산 PDA였다. 국산이라는 점이 구매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학생 때라 팜의 영어 인터페이스가 부담스러웠기 때문.

외형이 핸드폰을 닮았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당시에 핸드폰 가지고 다니던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는데, 전화같은 건 안되었지만 어쨌든 셀빅으로나마 그 부러움을 커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괜찮았던 디자인. 다만 핸드폰을 닮은 외형 때문에 영어 시간에 사전 어플 돌리다가 수업시간에 문자질 하는걸로 오해받아 압수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이북 리더인 쿨뷰와 사전 기능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학생이 PIMS 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친구들과 오델로를 즐겼으며, 파라오라는 게임은 내 셀빅의 액정을 바둑판으로 만들었다.

'세라트' 라는 어플은 셀빅 환경을 윈도우 느낌으로 만들어주었다. 마치 도스 시절에 M이 나왔을 때와 같은 충격을 주었고 새로운 느낌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버클록 어플도 있었는데, 기본 16MHz의 CPU를 22MHz까지 뻥튀기할 수 있었다. 세라트 같은 무거운 어플을 돌리는데 필요했던 것 같다. 오버클록을 하면 소리 재생 속도가 빨라졌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어플 이름은 기억은 안나지만, 음악 재생 어플이 혜성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8MB 메모리에 음악이 얼마나 들어가겠냐만은 그저 그 기기에서 미디가 아닌 음악이 재생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어플 제작자 분이 어플 소개글에 내가 변환한 포카리스웨트 CF송을 사용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2. 제스 플러스

Zess Plus

윈도 CE 2.11을 채용한 국산 PDA. 이 기기를 통해 윈도 CE와 처음 만났다. 10만원 중후반이라는 저렴한 가격이 최대의 장점이었다. 가독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모노기는 해도 음악 재생이 가능하다는 점에 반했었다. 사진은 미술 수업시간에 직접 만든 제스 플러스 거치대 (…)

윈도 CE 3.0이 나오던 시대의 윈도 CE 2.1 기기인데다, 당시 몰락하던 MIPS 계열의 CPU였던 터라 어플은 매우 부족했다. 게다가 75MHz라는 저스펙의 CPU라 모처럼 OS와 CPU 계열이 모두 맞아 떨어져도 못 돌리는 어플도 많았다.

그러나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는 용도에는 충분한 CPU였다. 무식이라는 궁극의 텍스트 뷰어로 판타지 소설을 신나게 즐겼다. 게임보이 에뮬이 있었는데, 느린 CPU 때문에 제대로 돌아가는 게임은 몇 안되었다. 별의 카비만 미친듯이 즐겼다.

SQ라는 인터페이스를 꾸미는 어플이 있었는데, 이 어플로 요리조리 꾸미는 것도 게임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3. 이지 프로 스위블

izzi Pro

삼성표 PDA. 삼성 홈페이지를 보면 정가는 90만원대였던듯 한데, 갑자기 시중에 30만원대에 풀려 인기를 끌었던 제품.

노트북 스타일의 PDA로, 256컬러, 8.2인치의 넓은 액정을 자랑했다. 스위블 버전(왼쪽 사진)은 액정이 터치 스크린으로, 액정 부분이 회전이 되어 패드 형태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시대를 생각하면 대단히 선구적이었던 제품. 터치패드 버전(오른쪽 사진)은 터치패드가 달려있었고 마우스를 달아 쓰는 게 가능했다.

구성품도 빵빵해 그 가격에 VGA 케이블까지 들어가있어 컴퓨터 모니터와 연결하고 잘 놀았다. 키감도 좋고 액정도 넓어 글쓰기가 너무 좋았다. 어떻게 보면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제품.

이 기기로는 글을 미친듯이 썼다. 기능이 적긴 해도 나름 워드와 엑셀이 내장되어있었다. 당시 나는 ─지금은 차마 내가 썼다고 말하기 부끄러운─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연재했는데, 대부분의 글을 이 기기로 작성했다. 넓은 액정에 거의 풀사이즈의 키보드, 부팅 시간이 없어 뭔가 떠오르면 바로 두들길 수 있다는 장점과 긴 배터리 시간이 글쓰기에 너무 좋았다. 당시 글쓰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기가 없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

삼성에서 만든 워드프로세서인 훈민정음도 내장되어있었는데, 훈민정음 파일이 쓰이는데가 없다보니 쓸 일은 없었다. 그래도 표도 그릴 수 있고 워드에 비해 엄청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제스 플러스와 같이 WIN CE 2.11에 MIPS CPU라 어플이 거의 없었다. 다만 제스 플러스보다 CPU가 조금 더 좋고 256컬러라서 별의 카비를 좀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었다(…)

4. 아이팩 3850

iPaq 3850

CE 2.1에서 맛보았던 아쉬움에 마침내 최신 기종을 구매하고야 만다. 하드디스크 확장팩까지 포함, 학생 시절 수 년간 모은 모든 재산을 투자해서 장만했다. 16비트 컬러의 화려함! 바로바로 뜨는 빠른 속도! 성능적인 면에서 첫인상을 강하게 받았던 기기다.

외진 산 위에 있는 한 달에 한 번만 집에 보내주는 기숙사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런 나에게 있어 짧은 여가 시간이나마 뭔가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기기였다.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장 많이 활용했다. 이북을 잔뜩 쌓아놓고 봤으며, MP3와 애니도 확장팩 하드디스크에 가득 담아 즐겼다.

그러나 고작 세달 남짓 쓰고 친구가 발로 밟아 사망한 비운의 기기. 다행히 하드디스크 확장팩이라도 살아남아 다음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5. 클리에 NR70v

Clie NR70v

순전히 디자인에 반해 구매하게 된 기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제품을 통틀어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기기. 은빛으로 샤방샤방하게 빛나는 슬림한 바디는 나를 매혹시켰으며, 320×480의 고해상도는 이전에 쓰던 아이팩 3850의 액정을 오징어처럼 보이게 하는 신세계였다. 쫀득쫀득한 키감의 키보드 역시 훌륭했으며, 회전시킬 수 있는 내장 카메라 역시 제법 잘 써먹었다.

“아, 이래서 어플 하면 팜이구나.” 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어플이 다양했다. 같은 기능을 하는 어플이라도 디테일한 면에서 보다 기능이 우수하기도 했다.

이 기기는 공부하는데 최고의 활용을 했다. KDIC 어플이 가장 큰 기여를 했는데, 사전 데이터를 임의로 추가할 수 있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다. 영한, 한영 사전 외에 백과사전 데이터도 넣어 필요한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PowerOne 어플 역시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과학고 학생이었던 나에게 그래프를 그릴 수 있는 계산기 어플은 크나큰 축복. 미국에 서머세션 갈 때도 이 기기와 함께했다.

TiBR 어플로 책 역시 열심히 읽었으며, ComicGuru 어플로 만화책 역시 신나게 즐겼다. 게임은 Bejeweled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게임할 시간 따위 별로 없기도 했고)

경의의 표시로 중고로 팔지 않고 현재도 소장중인 기기.

6. 넥시오 S155

Nexio S155

샘숭에서 만든 명품 PDA. 운좋게 A급 중고를 쿨매로 구할 수 있어서 쓰게 된 제품. 5인치 액정에 800×480의 고해상도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무선랜 내장으로 와이파이 잡히는 곳이면 얼마든지 인터넷을 즐길 수 있었다.

단점을 찾아내고 싶긴 한데, 사용성의 측면에서는 딱히 지적할 부분이 없다. 해상도는 높은데 내장 그래픽카드가 없어서 고해상도 동영상 재생이 힘들었다는 점 정도가 단점이긴 한데, 이는 사용성의 측면이 아니므로 패스. 과거 이지프로의 경험이 녹아들어있어서인지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사용자를 배려했다.

요즘 아이폰 가지고 노는 것과 비슷하게 즐겼다. 무식이로 독서를 즐기고, TCPMP로 동영상을 감상했다. 뒹굴대면서 MSN 메신저와 인터넷을 즐기는 것도 하나의 낙이었다. 둘둘말이 롤키보드를 사서 간단한 문서 편집을 하기도 했다.

삼성의 안타까움

이 모델의 차기작인 XP30 이후, 샘숭은 이 분야가 돈이 안된다고 판단하여 PDA 사업부를 해체한다. 많은 사용자들이 넥시오의 가능성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제품 살리기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삼성 결정권자들은 스스로 미래를 보지 못했고, 사용자들이 발견한 가능성 역시 무시하는 실수를 범한다.

아마 스마트폰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아마 삼성은 이때의 실수를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izzi pro는 서피스, 넥시오는 패블릿의 전신같은 기기. 삼성은 당시 시대를 대단히 앞서고 있었다. 좀 더 유지했으면 아이폰 같은 혁신이 삼성에서 먼저 나올 수도 있지 않았을까(넥시오는 2003년, 아이폰은 2008년 출시). 삼성은 운영체제를 만들 능력은 없으므로 사업부를 유지했다고 해도 아이폰처럼 혁신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업부가 유지되었다면 최소한 옴니아라도 훨씬 완성도 높은 제품으로 출시되었을 것이다.

7. 시그마리온3

Sigmarion3

넥시오의 아쉬운 점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 혜성같이 나타난 기기. 800×480의 해상도는 넥시오와 같지만 훨씬 좋은 액정을 장착하고 있으며, 내장 그래픽카드가 달려있어 동영상 재생 속도가 월등히 빠른 기기. 본체에 키보드까지 달려있어 활용도가 다양한 기기다.

아쉬운 점은 일본 제품이라 한글화 같은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하고, 일본에서만 쓸 수 있는 여러가지 불필요한 기능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거 다 버리고 무선랜이 내장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제품.

독서와 동영상 감상은 어떤 PDA를 쓰든 늘 해왔었던 것. 다만 무인코딩 동영상도 쌩쌩하게 돌릴 정도의 성능이라 더욱더 만족스러웠다. 두가지 용도를 제외하면 거의 PC에 원격으로 접속하여 사용했다.

그래픽 카드가 있다보니 동영상 감상 이외에는 상당한 속도로 웹서핑을 할 수 있었다. CF카드 슬롯이 있어, 들고 다니면서 디카로 찍은 사진 바로 큰 사이즈로 확인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대학생 초기까지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한 제품으로, 현재는 아이폰4를 장만하면서 책상 서랍에서 노후를 즐기고 계신다.